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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놀이터/인도(India)

[인도28] 인도의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 + 소금행진 + 암리차르 학살

by 돼지왕 왕돼지 201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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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 Mahatma Gandhi )

- 인도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이자 인도 건국의 아버지.

이미지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ingknight77&logNo=70079404548


-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얻고 남아프리카로 건너간 그는 인도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충격을 받아( 간디는 1등석에 앉아 있다가 짐과 함께 열차 밖으로 쫒겨났다. ) 인종차별 반대투쟁 단체( 사티아그리하 )를 조직하여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1913년 44세가 된 간디가 선두에 서서 행진한 나탈주에서 트란스발주까지의 사티아그라하 행진으로 아시아인 구제법이 제정되었고, 인도인에 대한 차별법은 모두 폐지되었다. 이 투쟁으로 간디는 세계의 간디가 되었다.

- 후에 인도로 귀국, 세계 제 1차 대전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인도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나, 전쟁 후 영국의 배신과 1919년 롤라트 법안( Rowlatt Act ) 와 같은 반란진압조령의 시행으로 사티아그라하운동을 전개하였다.

롤라트 법 ( Rowlatt Act )

1919년 3월, 영국이 인도의 독립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법이다. 이는 수색 영장 없이 체포, 재판을 거치지 않은 투옥을 인정하는 내용이다.


- 1919년 인도국민회의파의 지도자로서 영국에 대한 비협력운동 방침이 채택되었다. 납세거부, 취업거부, 상품 불매 등을 통항 비폭력 저항을 실시하였다. 운동은 성공하였으나 각지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1922년 간디의 호소로 운동은 잠시 중지되었다.

- 간디는 민족운동을 하며 여러번 투옥 및 석방되었다. 

-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인도의 찬성을 얻지도 않고 인도를 전쟁에 투입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한 인도는 완전독립의 약속을 얻어 내려고 노력하였으나, 상반된 이해관계로 타결을 보지 못하고 대규모 반영불복종운동에 돌입. 이로 인해 간디는 73세의 노령으로 다시 체포되어 1년 9개월의 옥고를 치룬다.

- 석방 후 인도의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힌두, 이슬람의 화해에 따른 인도통일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영국이 주권을 넘겨 줄 때 인도의 대정당인 국민회의파와 전인도 이슬람 연맹이 인도를 둘로 분할 독립할 것을 협정한 결과 오히려 격렬한 힌두, 이슬람 대립소동이 벌어졌다. 1947년 7월 인도가 이러한 분란 속에서 분할 독립. 힌두 이슬람의 갈등이 가장 심했던 벵갈에서 힌두 이슬람의 융화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 1948년 1월 힌두 이슬람의 융화 운동을 펼치기 위해 뉴델리로 왔으나, 1월 30일 반 이슬람 극우파인 한 청년의 흉탄에 쓰러졌다. 

- 일반적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폭력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으나, 인도에 있어서는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사상에 입각하여 평화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 철학적 견해는 신과 진리를 동일시하고, 도덕적 자기개선을 통해 그러한 진리를 포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불상해, 극기, 금욕 등이 그의 도덕적 원리이다.

- 사회적 정치적 견해는 제국주의자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민회의파의 지도자로서 인도 민족의 대중투쟁을 결집시켜 제 2차 세계대전 후 인도가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냈다.

- FYI) 인도의 모든 지폐에는 간디가 들어있다.

- FYI) 간디가 기차를 타다가 신발 한 짝이 벗겨졌을 때, 한 짝 마저 그 옆에 던져놓았다는 일화 유명. 가난한 사람을 위한 배려..

- FYI)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

출처 : 네이버 지식 백과 



소금 행진( Dandi Salt March )

- 영국 식민지하의 인도에서 1930년 3월 12일,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인들을 인솔하여 소금세의 폐지를 주장하며 아쉬람에서 단디까지 행진한 사건. 이로 인해 6만 명이 넘는 인도인들이 투옥되었고, 이 때 간디는 단식투쟁을 한다. 세계가 간디의 건강상태를 중개하자 석방시킨다.

FYI) 소금세는 인도인들의 소금 생산과 판매를 통제하고 과도한 세금을 부여한 것




암리차르 학살

- 1919년 4월 13일. 암리차르에서 1만 여명의 인도인들이 모여 영국의 공공 집회 금지 명령에 저항한 시위를 벌인다. 곧 다이어 장군과 그의 휘하 구르카 소총부대가 도착했고, 광장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포와 집단 살해 현장이 되고 말았다. 총격은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10분 동안 계속되었다. 영국은 397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인도인들은 8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주장.

- 인도의 학살 소식이 전해지면서 영국의 헌정 개혁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고, 영국에 협력을 찬성했던 온건파 중산층들이 골수 민족주의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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