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놀이터/스위스(Switzerland)

[스위스/취리히] 취리히( Zürich )를 유랑하다 4부 - 그로스 뮌스터, 성 페터 교회, 린덴호프

by 돼지왕 왕돼지 2012. 9. 5.
반응형




 이번에는 취리히의 관광명소들 교회 투어를 떠납니다.

성모 교회 ( Fraumünster )가 행사 문제로 입장을 거부(?) 해서 저희는 바로 성 페터 교회 ( St. Peter Kirche ) 로 향합니다. 


성 페터 교회의 내부입니다. 너무 웅장하지도 않고, 너무 소박하지도 않은 멋진 교회입니다. 하얀색 벽면, 대리석 기둥, 그리고 2층 단상 모두 소박한듯 웅장합니다. 멋집니다. 유럽 쪽에 또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면 교회의 목사님이 서는 위치에 보면 머리쪽에 왕관처럼 생긴 녀석이 항상 있습니다. 

관광명소가 아니고, 현지인들이 자주 찾는 교회라 그런지 사람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저희는 추위도 피할 겸 안에서 룰루랄라 교회 구경을 합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단상 왼쪽에 있는 바로 과자트리!!


어머니부터 액션을 취해봅니다. 저기 트리에 달려 있는 것들이 다 real 과자입니다. 비스킷 종류인데 처음에는 가짜 모형인 줄 알고 다들 먹는 시늉만 합니다.

Su 도 액션 한방
 

여기에 돼지왕이 빠질 쏘냐.. 저도 액션 한번 취하다가.. 돼지왕은 여기에 만족 못하고, 정말 과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 입 깨물어봅니다. 아니 이것은 진짜 과자!!! 그렇습니다. 저 과자 트리는 모형이 아닌 실제 과자를 걸어 놓았던 것입니다. 돼지왕의 도전으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아냅니다.

여기서 퀴즈!! 저기 걸려있는 사과들은 그럼 실제 사과일까요? 정답은 마지막에 공개합니다. ㅎㅎ

이미지 출처 : http://mappery.com/map-of/Zurich-Switzerland-Tourist-Map-5


성 페터 교회를 나와 이제 린덴 호프 ( Linden Hof ) 쪽으로 향합니다.


린덴 호프로 가는 길에 너무나도 귀여운 스위스 아이를 발견하여 찰칵 찍어봅니다~ 어쩜 저리도 인형같이 이쁠 수 있는지.. 정지 영상이지만,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가다 고개를 돌리고 헤헤 웃는 아기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린덴 호프 ( Lindenhof )

 린덴호프는 취리히 구시가지의 언덕위에 있는 작은 공원이다. 실제 이곳은 기원전 107년 로마인이 취리히에 정착하면서 세관을 세웠던 자리였으며, 구시가지와 함께 취리히의 기원이 되는 곳이다. 지금은 취리히 시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돌담을 사이에 두고 취리히의 멋진 전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


출처 : 이지 유럽 



이곳이 바로 린덴호프입니다. 사실 린덴호프는 그냥 언덕 위에 있는 작은 공원입니다. 있는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럼 린덴호프는 왜 여행책자에 소개되었느냐? 바로 전망이 좋은 터이기 때문이지요. 언덕 위에서 리마트 강쪽으로 이동하면 바로 이런 뷰가 보이기 떄문입니다.


 자 서서히 드러납니다. 멋진 뷰가~


자 시원하게 드러납니다. 취리히 구시가지의 모습이..


이곳에서도.. 어떤가요..? 생각보다는 별로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방문할 그로스 뮌스터는 꼭대기를 올라갈 수 있는데, 그 곳이 훨씬 높아 전망이 더 좋습니다 헤헤.. 그래도 그곳에 가기 전에 린덴 호프를 들려서 다행입니다.


그래도 저 멀리 일명 후추통이라 불리는 그로스 뮌스터의 쌍둥이 후추통 첨탑도 보이구요..


어머니는 "그 당시"에는 만족하셨는지 이렇게 멋진 포즈를 잡아주십니다. 린덴호프는 가볍게 산책하거나, 빵을 사서 점심을 해결하기에 좋은 장소로서 추천하지만, 전망을 위해서만이라면 그로스 뮌스터를 방문하기를 권장해 드립니다~


이제 마지막 관광지 그로스 뮌스터로 향합니다. 가던 길에 페스탈로치 동상을 목격(?) 합니다.



페스탈로치 ( Pestalozzi, Johann Heinrich )

스위스의 교육자이며 사회비평가이다. 루소의 교육론에 영향을 받아 "왕좌에 있으나 초가에 있으나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신념으로 농민 대중의 교육에 전력을 다하였다. 교육의 목적을 "머리와 마음과 손"의 조화로운 발달에 두고 노동을 통한 교육과 실물과 직관의 교육을 스스로 실천하였다. 그의 교육론은 많은 국가에서 받아들여졌으며 루소와 함께 신교육의 원천이 되었다.

이미지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arkpaulus&logNo=30039316072



출처 : 네이버 지식 백과


교육에 관련된 친구(?) 라는 것은 알겠지만, 뭔지 잘 감이 안 오는군요. 여튼 교육분야에 혁신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냥 스윽 지나쳐 갑니다. ㅎ

자 이제 대망의 그로스 뮌스터에 당도합니다.


이제는 해가 어느 정도 떠서 을씨년스럽지 않고 멋집니다. 위풍 당당합니다.

대성당 ( 그로스 뮌스터, Großmünster ) ☆ ☆ ★

 11~13 세기에 걸쳐 지어진 스위스 최대 규모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샤를 마뉴 대제가 세운 참사회로 지어졌다가 중세에는 콘스탄티누스 주교회로 이용되었다. 스위스 교회의 개혁을 상징하는 이곳에서는 1519년부터 종교개혁가 쯔빙글리가 설교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세 층으로 구분된 웅장한 파사드, 금속 소재로 덮인 동그란 연두빛 지붕이 인상적이며 성당의 남쪽 탑 앞에는 샤를 마뉴 대제의 동상이 서 있다. 1932년 자코메티가 만든 성당의 스테인글라스와 1950년에 오토 뭉크 ( Otto Münch )가 만든 브론즈로 된 정문도 유명하다. 184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알프스와 호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첨탑이 있다.

- 3/14~10월 월~토 09:00~18:00, 일 12:00~18:00
- 11월~3/14 10:00~17:00 
- 무료 입장, 종탑 2CHF
- 스위스 중앙역에서 나와 Bahnhofbrücke 다리를 건너 좌회전해서 Limmatquai 거리를 따라 도보 7분

출처 : 유럽 여행 100배 즐기기 




그로스 뮌스터는 입구가 뭔가 남다릅니다. 교회가 아닌 아니라 무슨 작은 왕궁을 온건 아닌지 하는 착각도 듭니다. 이 녀석이 바로 오토 뭉크가 만든 청동문!!



엄청 두꺼울 것만 같은 청동문을 확대해봅니다. 자세히 보니 작은 정사각형 하나하나에 다른 조각이 되어 있네요..


한번 더 확대해 보니 요런 그림들입니다. 성경에 나와있는 내용들을 바탕으로 조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 청동문에 있는 모든 그림이 다르다는 것이 참 신기하면서 위대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녀석은 유럽 교회들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오르간입니다.


그로스 뮌스터의 내부는 깔끔하면서 오래된 느낌이 듭니다. 


교회 내부에는 자코메티가 만든 스테인글라스들이 있습니다. 매우 고요하면서도 고풍스럽습니다.


유럽의 교회들에 있는 스테인글라스들은 어쩜 저리도 아름다운지.. 간혹 있는 한국 교회의 스테인글라스와는 비교 자체를 거부합니다.

요것이 교회 내부 전경..

샤를 마뉴 대제

교회 안을 샅샅히 훑다 보면, 이렇게 샤를 마뉴 대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금빛 왕관과 금빛 칼 손잡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금으로 되서 그런지 제가 빼내려고 해도 놓지 않습니다. ㅋㅋ 죽어서도 욕심쟁이입니다.. ㅎ

샤를 마뉴 대제 ( Charlemagne, 742~814 )
   - 서유럽을 통일하고, 황제에 즉위한 카롤링거 왕조의 군주.

이미지 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650


- 샤를 마뉴는 프랑스어로 "샤를 대제"를 뜻한다. 독일에서는 "카를 대제" 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찰스 대제" 이다.

- 샤를 마뉴는 샤를피핀과 베르트라 왕비 사이의 장남으로 742년 태어났다. 그는 예리하고 큰 눈에 짧고 굵은 목을 가졌고, 성인이 되었을 때 키는 190센티미터를 넘었다고 한다. 다만 목소리만은 높고 가늘었다고 한다.

- 그를 위대한 영웅으로 그린 "아인하르트"에 따르면 '당대의 그 어떤 지배자보다도 유능하고 출중했다. 무엇이든 한번 손댄 일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끝을 보았으며, 궁지에 처해서도 절망하지 않고, 행운 앞에서도 교만해지지 않았다.' 고 한다. 고귀한 신분으로 자랐음에도 글을 일고 쓸 줄 몰랐다고 한다.

- 샤를 피핀이 새로운 프랑크 왕이 되고 17년만에 아키텐과 전쟁을 벌이다 죽자, 샤를마뉴는 그를 계승한다. ( 768년 ) 프랑크족은 분할 상속의 전통이 있어, 동생 카를로망과 왕국을 둘로 나누어 가졌다.  2년 후 카를로망이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프랑크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  샤를 마뉴는 재위기간 중 열 차례의 큰 전쟁과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으며, 그 결과 프랑크의 영토를 두 배로 늘려 놓았다. 서유럽에서 영국,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남부를 제외한 전부가 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특히 무려 33년 동안 계속된 ( 772~804 ) '작센 전쟁'의 결과 그 때까지 유럽 문명권의 바깥에 있었던 상당수가 유럽에 포함되었고, 그것은 이후 유럽 역사에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

- 8년 동안 계속된 훈족( 아바르족 ) 과의 전쟁으로 헝가리 지역이 정복되었고, 이 때 프랑크인이 그 어느 전쟁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막대한 부가 획득되었다. 

-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서 전쟁을 벌인 경우 샤를 마뉴는 로마를 방문해 교황에게 예우를 다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800년에는 교황 레오 3세의 손으로 성 배드로 성당에서 '서로마 황제'의 황제관이 샤를마뉴의 머리에 씌워졌다. 이는 프랑크와 로마 교회 양쪽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으로써 성사된 일이었다. 샤를 마뉴는 사방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침략과 반란을 억누르기에 무력만으로는 한계를 느꼈으며, 따라서 교회의 권위와 옛 로마제국의 권위를 빌리고 싶어 했다. 한편 로마 교회는 726년 에 비잔틴제국의 레오 3세가 '성상파괴령'을 내리고 로마교황에게도 교회 안팎의 모든 성화상을 없애라고 지시하자 이를 거부함으로써 비잔틴제국과 등진 처지였다. 비잔틴 황제는 로마에 인접한 롬바르드를 부추겨 교황을 공격하게 했으며, 로마 교회 내에서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비잔틴 계열의 성직자들에게도 음모를 꾸미게 했다. 그리하여 역대 교황은 생존을 위해 프랑크 왕국의 힘을 빌리려 해왔으며, 샤를마뉴를 서로마 황제로 인정한 것은 그 결정판이었다.

- 샤를마뉴는 기독교의 적 이슬람권에 대해서도 무력보다는 외교 위주로 접근했다. 막강한 이슬람 제국과 굳이 충돌할 필요가 없다고 본 때문도 있고, 비잔틴과 이슬람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하여 이익을 보기 위함도 있었다.

- 샤를마뉴는 굴복시킨 적들을 종종 잔혹하게 학살했다. 그가 참여한 마지막 전쟁인 808년의 데인 인들과의 전쟁에서는 붙잡은 포로들의 키를 재어 검의 길이보다 크면 모조리 살육하기도 했고, 새로 복속시킨 게르만인이나 슬라브인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거나 교회나 성직자를 공격한 자들은 가차없이 처형했다. 심지어 예배를 빠지거나 금식 주간을 소홀히 한 사람조차 처형했다.

-  샤를마뉴는 왕권의 강화와 제국의 통합을 늘 고심했다. 그가 끊임없이 동서남북을 다니며 전쟁을 벌인 까닭은 새로 얻은 영토를 신하들에게 봉토로 나눠주고 충성을 얻어내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오래 전에 복속시킨 영주들의 충성을 재확인하려는 뜻도 있었다. 그는 봉토를 나눠줄 때도 인접한 땅을 한 사람에게 주지 않았으며, 새로 봉토를 주면서 예전에 준 봉토는 돌려받는 등 지방 영주들이 자체적인 힘을 키우지 않게 만전을 기했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지방귀족을 감시하는 순찰사를 각지에 파견했다. 그는 매년 5월과 10월에 귀족과 자유민을 소집해 집회를 열었으며, 귀족들과의 회의를 거쳐 칙령으로 새 법률을 제정하고, 자유민들의 충성 서약을 받은 뒤 전쟁터로 출정했다. 

출처 : 네이버 캐스트 


샤를마뉴 대제 이후 서유럽은 여러 나라로 갈라졌으며, 그 후로 히틀러나 나폴레옹에 의한 잠시점령 이외에는 하나로 "통일" 된 적은 없다고 하네요. 샤를 대제는 엄청난 사람이었군요.. 독일 여행 다를 때 Karl 대제를 많이 봤는데 그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습니다. ㅎㅎ


빅토르 위고가 "후추통" 이라고 표현한 첨탐의 꼭대기 부분입니다. 정말 첨탑 끝부분은 후추통 2개를 세워 놓은 것 같습니다. ㅎㅎ 이 첨탑의 꼭대기는 아주 가파른 계단 184개나 열심히 올라가야 합니다. 하지만 첨탑 입장료가 있다는 것이 에러... 2012년도 정보에 따르면 4CHF ( 2012. 09. 환율 기준 1180 기준 약 4700원 ) 를 받는다고 합니다. 제가 갔던 2008년 초에는 2CHF 정도 했던 것 같은데 엄청 비싸졌네요 ㅠ. 그래도 올라가볼만 합니다. 체력을 비축해놓고 방문하세요~ ㅋ


그로스 뮌스터 꼭대기에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이렇게 취리히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취리히 호수도 보이구요.. 리마트 강 마지막 단에는 빨간 지붕의 서커스단도 있네요. 저 서커스단은 순회공연을 한다고 하며, 구경하고 싶었으나.. 공연 일정도 몰랐고 가격도 비싸서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했습니다..


한쪽으로는 구시가지 넘어 공장지대도 눈에 띄구요.. 가까운 쪽에는 구시가지의 유럽의 이쁜 건물들이 즐비해 있습니다. 교회의 첨탑들이 이쁩니다. 가까이 있는 시계탑은 성 페터 교회의 첨탑입니다.


한쪽은 저렇게 빨간 첨탑이 있어 너무나도 이쁩니다.빨간 첨탑은 유럽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데 말이죠.


이러면 안 되는데.. 후추통에 많은 관광객이 낙서를 해논 것을 보고, 우리도 이름을 남겨봅니다.. 지나고 나니 부끄럽네요.. ㅠ 다시 방문했을 때 기록이 남아있어도 좋겠지만.. 부끄러운 기억이기 때문에 보수공사를 해서 지워졌어도 흐뭇할 것만 같습니다..



가파른 184개의 계단을 열심히 올라오셨던 어머니는 그냥 내려가기 아깝다면서 중간에 있는 창가에 걸터앉아 취리히 시내를 감상하십니다.


호이!! 외침에 포즈를 취해주시는 귀여운 어머니.. ㅋㅋ


계단이 얼마나 가파른지는 이 사진을 통해서~ 매우 투박하고 좁은 계단입니다. 어머니께서는 다시 봐도 그 때 어떻게 저길 올라갔을까 하십니다. ㅎㅎ 184개였다는 사실에 지금도 "헥~" 하십니다. ㅎㅎ

이제 취리히의 일정은 끝났습니다. 다음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 다시 Hottingen 호텔로 이동하여 짐을 찾고, 중앙역( Haupt Bahnhof ) 로 향합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유럽의 중앙역은 정말 멋집니다. 대부분이 중세풍이며, 역사도 오래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산업혁명 당시 열차를 중심으로 문화경제가 발달했기 때문에 역도 멋지게 지었던 것이겠지요.,


다음 일정으로 떠나는 우리 모자. 그리고 찍사 Su. 자 다음 도시로 출발합니다~

마지막으로 앞서 냈던 퀴즈. 사과도 진짜일까요?? 에 대한 답입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손가락 꾸욱~ ( 로그인 필요 x )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