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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연기법 - 도표로 읽는 불교 교리
돼지왕 왕돼지
2025. 11. 26.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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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도표로 읽는 불교 교리' 의 책을 읽으며 핵심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거나, 모든 내용을 읽고 싶으시다면 책을 구매해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가상현실로 구현한 K팝 공연
- 당신도, 당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인연 맺고 사는 타인들도, 또 이 세계도 모두가 저 홀로그램 입체상과 같은 가상의 현실이다! 다만 인연이 임시로 모여 진짜로 있는 것처럼 보일 뿐!
무지개처럼 나도 세상도 진짜가 아니야
-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인연 따라 만들어진 허상
- 불교 핵심 교리인 연기법에서는 실재인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인과 연이 합쳐져서 있는 듯이 나타난 것일 뿐이라고 설한다.
- 연기적으로 볼 때 나는 내가 아니라 무아(無我)이며, 세상도 실제가 아니라 비실체이며 공(空)하다.
- 여러분 앞에 펼쳐져 있는 이 모든 세상이, 나와 나의 가족, 나의 직장 등 지금까지의 삶과 이 세상 모든 것이 사실은 실재가 아니라 내 마음에서 연기되어진 것일 뿐이다!
양자물리학, 홀로그램과 불교
티끌 속에 담긴 우주
-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어 하나가 곧 일체요, 전체가 곧 하나다. 한량 없는 오랜 세월이 한 생각 찰나요, 찰나의 한 생각이 무량한 시간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다른 듯하면서도 모두가 현재의 이 마음에 함께 있어서 얽힌 듯하지만 얽히지 않고 각각 뚜렷하게 이루어졌다
연기(緣起)란 무엇인가
-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독자적으로 저 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 말미암아 생기고, 무언가에 의해서 의존해서 생기는 것이라는 뜻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 연기법에서는 삼라만상이라는 모든 존재의 생성과 소멸, 즉 생과 사에 대한 시간, 공간적 연기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 생사법(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은 저 홀로 실체성을 가지고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의상관적인 관계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독자적인 '나'는 없다. 무아(無我)!
- '나'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법적인 연결성으로 잠시 동안만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무분별과 불이중도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곧 '이것'과 '저것'은 뗴어 놓으려고 해도 뗴어놓을 수 없는 관계, 즉 '하나'임을 뜻한다. '이것'은 '저것'에 의해 '이것'일 수 있고, '저것'은 '이것'에 기대어 '저것'일 수 있다. '이것'과 '저것'은 동시생 동시멸이다. 불이(不二)의 관계다.
- 이것을 확장해 보면, '나'는 '너'에 의해 '나'일 수 있으니, '나'와 '너'는 둘이 아닌 하나다. '크다'는 '작다'에 의해 '크다'일 수 있으니, '크다'와 '작다'는 둘이 아닌 하나다. '나'는 '나 아닌 것들'에 의해 '나'일 수 있으니, '나'와 '나 아닌 것들'은 둘이 아니다. '나'는 '나 아닌 것들' 즉 이 우주 만물 전체와 둘이 아닌 하나다.
- 이러한 연기적인 지혜 없이 세상을 보면, 세상은 나와 너, 아군과 적군,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앞뒤, 고저, 대소, 장단 등 무수히 많은 둘로 분별되지만, 이 연기적인 지혜에서 그 양변인것처럼 보이는 극단은 사실 둘이 아니다.
- 그럼에도 연기적인 지혜가 없는 중생들은 '하나'인 진실은 보지 못한 채, '이것'이 아닌 '저것'이멘 집착하고,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을 취하려고 애쓴다. 이와 같이 분별과 취사간택심이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연기법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 연기법으로 세상을 보면 차별심을 버리게 되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정견), 치우치지 않고 보게 되고(중도), 온 우주 삼라만상은 분별 없는 대 평등심의 하나라는 진실이 드러난다.
-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법의 두 가지 의미
- 삼라만상을 부를 때,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이라는 의미로 '생사법'이라는 용어를 쓴다. 통상 법은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 첫째는 '진리'의 뜻이고, 둘째는 '존재'의 뜻이다.
- 결국 존재가 곧 진리이고, 진리가 곧 존재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모두 연기법의 진리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 현실의 만물을 볼 때, 바로 거기에서 진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보이는 그대로 진리다. 다만 중생은 연기법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분별망상이라는 허망한 의식을 통해 현실을 왜곡하여 볼 뿐이다. 볼 때 볼 뿐이 되지 못한다.
- 있는 그대로를 자기 식대로 의식의 필터로 해석해서 바라본 뒤에, 그것을 판단하고 대조하고 분별하여 좋고 나쁜 것으로 둘로 나누어 놓는다. 그런 뒤에 좋은 것에는 집착하고, 싫은 것은 거부하면서 취사간택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분별망상이고, 양 극단으로 치우친 극단이요, 취사심이다.
- 부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라'(위빠사나, 정견)고 하셨고, '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중도로 보라'고 하셨으며, 바로 그렇게 있는 그대로 볼 때 곧 연기중도로써 바라보게 됨을 설하셨다.
연기, 무아, 자비, 중도는 하나
- 불교의 모든 교리와 사상은 사실 하나의 진리에 대한 다양한 서명이다. 연기가 곧 무아이며, 이것이 곧 자비이고 중도이다.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법칙은 큰 것이 있으므로 작은 것이 있고, 옳은 것이 있으므로 틀린 것이 있고, 중생이 있으므로 부처가 있고, 이런 식으로 우리가 분별하는 모든 분별의 생각들을 거두어,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둘이 아니게 연결되어 있음을 설하고 있다. 이를 초기불교에서는 중도, 대승불교에서는 불이중도, 선불교에서는 일심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 볼펜은 긴 것일까, 짧은 것일까? 있는 그대로 보면 긴 것도 짧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볼펜 옆에 긴 막대기라는 인연이 오면 작고, 반대로 성냥개비라는 인연이 오면 길다. 즉 연기적으로만 길거나 짧을 수 있을 뿐, 그것 자체에 고정된 실체성이 없다. 연기이며 무아다. 여기에서 무아라고 하는 것은 '그것 자체라고 할만한 고정된 실체성을 지닌 존재는 없다'는 뜻이다.
- 그렇기에 볼펜을 가지고 '길다'고 해도 극단이고, '짧다'고 해도 극단이다.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인 견해야말로 지혜로운 견해이며, 연기적인 관점이다.
- 연기법에서 보면, 일체 모든 것들은 전부 비실체성을 띠며, 무아적 존재다. 그렇기에 어떤 것에 대해서도 양 극단으로 판단하지 않고 중도로 볼 수 있어야 한다.
-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하되 함이 없이 하라'. 이를 무위법이라고 한다. 즉 마음을 내지 않을 수는 없다. 좋다고도 말하고, 나쁘다고도 말하지만, 내면의 지헤에서는 그런 판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기법을 실천하는 자세이고, 무아와 중도의 실천이다.
- 연기, 중도, 무아를 실천하면, 그를 있는 그대로 볼 뿐,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게 된다. 비교할지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연기, 중도, 무아로써 보는 것은 곧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곧 위빠사나요, 사념처 수행이고, 정견이며 정념이다.
-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대해 주는 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심, 즉 자비심이다. 판단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판단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자비다.
인연생기, 인연화합
- '인'은 결과를 발생케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고, '연'은 간접적이며 보조적인 원인이다.
- 예를 들어 식물의 직접 원인인 '인'은 씨앗이고, 간접 원인인 '연'은 거름과 흙과 태양과 공기와 물과 농부의 노력 등 식물을 싹 틔우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간접적인 일체의 원인이다.
무인데, 인연 따라 유가 생겨났다
- 모든 것은 다만 인연이 모이면 생성되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진다.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함으로 저것이 멸한다'는 인연법, 연기법의 이치에 따라 생성, 소멸될 뿐이다.
인과. 끌어당김의 법칙
- 특별히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과 그에 따른 결과라는 인과를 별도로 업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 주체적인 인간의 육근과 객관적인 대상이라는 육경 사이의 법칙인데, 인간이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작용을 일으키면 생,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은 필연적으로 그에 따른 반응을 보인다.
- 당연히 사람들은 '좋은 업을 지어라'는 말보다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표현 방식에 더 열광한다.
- 불교는 정공법으로 좋은 업을 지으라고 말한다. 내가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두는 것이다.
- 좋은 업을 내보내야 좋은 과보를 끌어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내보내는 것이 곧 끌어당겨지는 것이며,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다.
연기법의 생활 실천
감사와 찬탄
- 내가 잘나서 이렇게 잘 자랐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오만한 생각이 있을까?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삼라만상 일체의 모든 존재들이 나를 돕고, 나를 살려 주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다.
- 연기적인 자각은 이처럼 우리를 따로따로 떨어진 저 혼자 잘난 개별적 존재로 보지 않고, 연결된 전체로서의 하나로 보게 함으로써, 나를 있게 한 일체 만법에 무한한 감사와 찬탄을 본내게 한다.
보시, 자비로운 나눔
- 일체 모든 존재들이 자비로운 보살핌으로 나를 살려 주었다면 그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보시와 나눔이다. 연기적인 삶에 나와 너라는 분별은 사라진다.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이며,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일 수밖에 없는 동체적인 한 생명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 연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 기아와 가난에 허덕인다면 그것은 곧 내가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어찌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상대방에게 보시를 행하는 것은 곧 내가 나 자신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주는 것'은 곧 내가 '받는 것'이다.
- 이러한 동체대비야말로 연기적인 자각속에서 꽃피어나는 상 없는 자비이며 무주상보시다.
수용, 받아들임
- 연기법의 세계에서 보면, 나에게 주어진 현실 또한 엄연한 인과응보의 결과일 뿐이다. 언뜻 보기에는 억울하고 불평등한것 같을지라도 그것은 엄연한 인과의 법칙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 이러한 연기와 인과의 법칙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앞에 펼쳐진 그 모든 것들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다. 그 어떤 현실도 원인 없이, 이유 없이 나타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지을 때는 복도 짓고 죄도 짓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우리의 삶을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게 마련이다. 지을 때는 선행과 악행을 함께 지어 놓고 받을 때는 선행의 결과만 받고자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 참된 수용은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불이법의 수용은 곧 삶과 통째로 하나로 계합하는 것이다. 분별 없이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곧 중도의 실천이다.
무집착, 내려놓음
- 이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연기하며 변화하기에 영원한 것은 없다. 붙잡아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집착하고, 그것이 소멸될 때 괴로워하며 아파한다. 언젠가 떠날 것이 분명하다면 붙잡아 집착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 인연 따라 잠시 생겨난 것을 내 것이라고 붙잡으면 남는 것은 괴로움뿐이다. 연기적인 삶이란 방하착이요, 집착을 내려놓는 삶이다.
관, 깨어 있는 관찰
-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연기법이라는 이치를 깨닫게 되셨을까?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온전한 관찰, 관저에 있다. 분별 없고 치우침 없는 관찰에 있다. 중생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자기 식대로', '의식으로 걸러서' 해석해서 왜곡되게 바라보지만, 부처님은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것'일 뿐이다.
- 이러한 '있는 그대로를 분별 없이 보는' 관 수행. 위빠사나야말로 나와 내 밖의 우주에 대한 지혜로운 통찰을 가져다 준다.
공존, 조화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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