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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2 05:38







지난번 스위스에 대한 이모저모는 스위스의 기본 특성들을 알아보았죠? 오늘은 스위스의 역사에 대해 한번 쭉 알아볼까 해요. 외울 필요 이런 것 없이 그냥 즐겁게 쭉~ 읽으면 재미있을꺼예요. 책방에서 세계사 관련 책을 읽듯이 말이죠.

출처 : 이원복의 새 먼나라 이웃나라 스위스편


스위스의 기원 & 로마시대

- 스위스에 처음 뿌리를 내려 정착한 민족은 "게르만" 민족의 한 줄기인 "켈트족".

- 이 켈트족은 다시 여러 갈래로 나뉘는데, 프랑스 지방으로 간 족속은 "갈리아(Gaulois) 족" 이고 스위스 땅으로 간 족속은 "헬베티아(Helvetia) 족" 입니다.

- 스위스의 헬베티아족은 노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용감 무쌍한 무리로, 성질이 사납고 전쟁을 즐겨했습니다. 그들은 이곳저곳 들쑤시며 침략하고 다녔는데, 프랑스를 침략하던 로마 군대와의 전투에서 대패한 후로는 스위스지방에 숨어 지냈습니다. 기원전 5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줄리어스 시저 )" 가 헬베티아 족을 정벌하였고,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까지 약 500년간 로마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 때 정복자 카이사르가 스위스 지역을 헬베티아 족이 사는 땅이라 하여 "헬베티카"로 명명하였습니다. ( 이것이 1부에 나왔던 CH 의 기원이 되었죠. )

- 서양에서는 로마의 침략을 받으면 처음엔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우고 결국 항복하더라도 로마에게 반항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가 가져오는 빛나는 문화, 뛰어난 정치와 기술은 차츰 정복당한 민족으로 하여금 로마 사람이 되도록 끌어당기는 엄청난 힘이 되었습니다. 로마가 정복했던 유럽의 거의 전체는 로마 문명을 자기 나라 문명의 뿌리로 삼게 되죠. ( 중국의 한나라와 비슷한 꼴 ) 스위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스위스 지방은 위치상 로마 제국이 알프스 산맥 북쪽을 지배하는 데 중요한 군사 기지 노릇을 하게 됩니다. 스위스는 독일과 이탈리아를 잇는 중요한 통로이죠. 다시 말하면 북유럽과 남유럽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ky2you.egloos.com/113603

북유럽과 남유럽을 잇는 통로





로마 제국 멸망 이후 & 프랑크 왕국 & 도이치 제국 & 합스부르크가 & 스위스의 탄생

- 로마제국 멸망 이후 북쪽에서 내려온 게르만 족이 세력을 크게 떨치게 됩니다.

-  로마제국 멸망 이후 스위스 지방은 "프랑크 왕국"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프랑크 왕국은 나라의 틀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각 지방은 별 간섭당함 없이 지내고 있었으며, 스위스의 서쪽과 남쪽은 산맥으로 경계가 지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독립된 생활을 영위합니다.

-  고대의 스위스는 산악지형이라는 특성 때문에 별다른 수입이 없었고, 직업 군인(용병) 으로서 생활을 영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산악지형에서 생활해서인지 스위스 용병은 용맹하며 전투를 잘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럽 여러 나라 왕들에게 용병으로서 큰 인기가 있었지요. 당시 스위스 지방은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프랑크 왕국은 스위스 영주들에게 봉토를 하사하고 대가로 용병을 지원받았습니다. 

- 지리적 특성을 잘 이용한 스위스는 영토를 늘려가면서도, 자치권을 지속적으로 행사합니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크 왕국의 왕은 교회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교회에 스위스 지방의 많은 땅을 주어 다스리도록 하여, 교회가 영주만큼 세력을 누리도록 하여 영주세력을 견제한 것이죠.

- 교회의 사제와 승려들은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사망하면 프랑크 왕국의 왕은 새롭게 교회의 우두머리를 임명해야만 했죠. 권력에 욕심많은 사제와 승려들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되어 교회를 손아귀에 쥘 수 있었고, 왕의 보호 아래 스위스 지방의 영주세력 견제를 충실히 하게 됩니다.

- 프랑크 왕국의 세력이 커질수록 왕은 권력행사를 더욱 철저히 하게 됩니다. 이에 맞선 것이 교황입니다. 교황은 하느님, 예수님 다음으로 높은 위치로 왕도 자신의 아래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왕과 교황의 권력 싸움이 발생하게 되고, 이에 왕국영토 구석구석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이들의 세력이 자라자 왕쪽에서도 교황쪽에서도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데, 지방의 영주들은 중립적 입장을 취하며 계속 세력을 키우게 됩니다. 점차 세력이 커진 지방 영주들은 이웃지방 침략에 들어가게 되고, 왕에게는 묵인해주는 댓가로 많은 조공을 바칩니다. 그래서 스위스 지방은 몇몇 큰 영주가 권력을 잡고 다스리게 됩니다.

- 스위스 지방에서 가장 큰 세력을 떨치던 가문은 "합스부르크(Habsburger) 가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스위스 지방 거의 전부는 물론 오스트리아 지방까지도 지배하던 큰 세력이었습니다. 본래 스위스 민족은 자유를 중요시 하는 민족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탐탁치 않아했습니다. 마침 합스부르크 가의 집안 싸움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합스부르크 가는 1232년 몇 동강이로 갈라집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cityofart.net/bship/frameset9.html

 합스부르크 가문 엠블렘

이미지 출처 : 이원복의 새 먼나라 이웃나라 스위스편

집안 싸움 전 합스부르크가의 세력

 - 합스부르크가는 이탈리아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스위스의 알프스 지역까지 탐내게 됩니다. 합스부르크 가가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유럽 제일의 세력을 뽐내고 있었으나 결국은 도이치 황제의 신하였기 때문에 함부로 남의 땅을 침략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도이치 황제는 프리드리히 2세였고 스위스 남부 알프스 지역은 그의 소유였습니다. 그는 반항하는 신하들을 누르는 데 애를 먹고 있었고, 이를 이용한 합스부르크 가는 반항하는 세력을 제압하는데 병력을 지원하는 대신 알프스 지역의 통치를 허락 받습니다. ( 사실 왕은 이 지역이 이탈리아로 세력을 뻗기 위한 교두부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당시 반항세력 억제가 급했기 때문에 허락한 것이라 합니다. ) 

-  도이치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가 노쇠하여, 아들 하인리히가 권력을 잡았을 때, 자유를 원한 스위스 지방 사람들은 합스부르크가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인리히에게 지속적으로 조공을 바칩니다. 이에 하인리히는 합스부르크 집안으로부터 스위스 지방을 돌려받으며, 다시는 어느 누구에게도 통치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스위스 역사에 중요한 첫 "자유 서약서( FreiheitsBrief )" 로서 스위스 역사에 처음으로 자유와 자치권을 인정받은 주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 주가 바로 "우리(Uri)" 주입니다.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우리(Uri) 주 엠블렘

-  우리주가 한 방식으로 "슈비츠(Schwyz)" 주가 합스부르크 주의 지배를 벗어났으며, 뒤이어 "옵발덴(Obwalden)" 과 "니드발덴(Nidwalden)" 주도 자유를 찾았습니다. 이 4개의 주가 오늘날 자유 스위스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flags-and-anthems.com/state/flag-schwyz.html

슈비츠 주 엠블렘


이미지 출처 : http://www.about.ch/cantons/obwalden.html

옵발덴 주 엠블렘


이미지 출처 : http://da.wikipedia.org/wiki/Fil:Flag_of_Canton_of_Nidwalden.svg

니드발덴 주 엠블렘


- "대공위 시대" 라 하여 도이치 황제를 물려받아 다스리던 집안의 대가 끊겨 황제 자리가 공석이 되어 나라가 혼란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 때 각 지방의 세력 있는 영주들이 모여 황제를 선거로 뽑았지만, 선거로 뽑히기 전까지는 세력 있는 영주들이 날뛰었었죠. 가장 큰 세력 있는 집안의 하나인 합스부르크 집안은 하인리히 황제가 인정한 4개의 스위스 자치주들을 침략하여 다시 지배자로 군림합니다. 과거 4개 주의 태도에 불만이 많았던 합스부르크가는 공포정치를 펼치는데,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는 자는 모조리 잡아 가두거나 사형을 처합니다. 

- 합스부르크가의 공포정치에도 불구하고 스위스인들은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끈질긴 싸움을 시작했는데, 이 때 활약한 사람이 "빌헬름 텔" 입니다. 합스부르크의 탄압을 피해 자유를 찾아 차츰 많은 사람들이 깊은 알프스 산맥으로 숨어들었고, 그들이 큰 무리를 이루게 됩니다. 자유, 독립을 되찾기 위한 싸움을 벌이는데, 자유 4주( 슈비츠, 우리, 옵발덴, 니드발덴 )에서 모여든 스위스 사이에 엄숙한 동맹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들의 동맹을 "제 1차 동맹( Der 1. Bund )" 혹은 "스위스 동맹" 이라 부르는데, 동맹조약 내용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구두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 동맹에 가입한 우리들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영원히 단결한다!
* 서로서로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도 서로 도우며, 만일 우리 가운데 하나가 외적의 침략을 받으면, 모든 물자와 능력을 동원하여 함께 싸우리라!
* 우리 사이에 혹시 다툴 일이 생기거나 옳고 그름을 가리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리 동맹에 가입하지 않은 공정한 이웃을 심판관으로 삼아 판결을 받으리라!
* 우리는 서로간에 신의를 지키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한 형제, 한 몸으로 영원히 함꼐 하리라!

 
제 1차 동맹이 이루어진 1273년을 "스위스"가 탄생한 해로 보고 있습니다.

- 합스부르크가에 대한 싸움이 열기를 띠자 차츰차츰 동맹에 가입하는 주가 늘어가 8~9주로 늘어나고, 스위스 동맹군은 합스부르크에게 커다란 위협이 됩니다. 당시 합스부르크가의 우두머리는 오스트리아 왕 "레오폴드 1세"로 스위스 동맹군을 제압하기 위해 큰 군사를 일으킵니다. 

이미지 출처 : 이원복의 새 먼나라 이웃나라 스위스 편

 합스부르크가의 공격 루트

이 맹공에도 불구하고, 산악지역의 특성과 매복이라는 전술을 잘 활용한 스위스군은 레오폴드 1세의 대군을 격파합니다. 이 전투가 "모르가르텐" 전투입니다. 이 모르가르텐 전투는 스위스가 거둔 첫 군사적 승리입니다. 

- 스위스의 알프스 지역은 남유럽으로 가는 통로였기 때문에 합스부르크가에서는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지만, 침략하기에는 손실이 크기 때문에 합스부르크가는 자유 스위스 동맹과의 휴전, 평화 조약을 제기하고, 이는 성사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끈끈한 동맹의 중요성을 상기한 스위스는 새로운 동맹을 맺습니다.

1. 어떤 주도 다른 주의 동의나 허락 없이는 어떤 지배자를 섬기지 않는다! 즉 허락 없이 남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2. 우리 동맹에 가입한 주는 다른 주의 동의 없이 그 누구와도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된다.
3. 우리 동맹에 가입한 주는 전쟁을 치르게 된 주와 모두 살고 죽기를 같이 한다. 

 
이는 오늘까지 지켜져 내려오는 스위스의 외교 정책의 원칙이며, 다른 나라에 간섭받지 않고,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칙은 오늘의 영구 중립국의 바탕이 됩니다. 그래서 스위스를 오늘날에도 정식으로 "스위스 동맹( Schweizerische Eidgenossenschaft )" 라 부릅니다.







스위스의 탄생 그 후 & 합스부르크 왕가 & 프랑스

- 모르가르텐 대첩에서 스위스 동맹군이 레오폴드 1세의 대군에 승리하자, 합스부르크 통치에 불만을 품은 여러 지방에 자유, 독립의 뿔을 당기게 됩니다. 먼저 "루체른(Luzern)" 주가 스위스 동맹에 가입했습니다. 이런 움직임들이 보이자 합스부르크가는 스위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스위스 동맹에 가입하고자 하는 "취리히" 주를 위협합니다. 이에 취리히 주는 동맹에 가입할 것을 요청하며 도움을 구합니다. 이에 발끈한 합스부르크가는 어떻게든 취리히 주를 굴복시키고자 군대를 파견합니다. 취리히 시장 "브룬" 은 동맹군과 연합하여 합스부르크가를 쫓아내지요.

 

이미지 출처 : http://www.about.ch/cantons/luzern.html

루체른 주 엠블렘

 

이미지 출처 : http://flagspot.net/flags/ch-zh.html

취리히 주 엠블렘


- 취리히가 동맹군에 편성된 후, 취리히의 안전을 위하여 합스부르크 지배 아래 있는 스위스 동맹과 취리히 사이의 지역을 점령, 동맹의 영토로 선포합니다. 

출처 : 이원복의 새 먼나라 이웃나라 스위스편



 - 스위스 동맹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합스부르크 왕가는 더 이상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볼 수 없어 다시 대군을 파견합니다. 1388년 "젬파흐( Sempach )"  전쟁에서 스위스군은 다시 대승을 거두고, 휴전 협정을 맺는데 그 내용은 50년 동안 절대 서로 공격하지 않는 다는 내용이지요.
 
- 이 와중에 취리히 주는 엉뚱한 속셈을 품게 됩니다. 독립하고 싶은 의지와 재력, 그리고 영국와 프랑스 사이의 백년 전쟁( 1337~1453 ) 이 끝나며 전쟁에 참가했던 스위스 직업 군인들의 복귀로 인한 군사력 강화 등의 계기로 취리히는 동맹의 탈퇴를 선언합니다. 동맹군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이에 취리히 주는 스위스 동맹의 지도적 역할을 하던 슈비츠 주에 압박을 가합니다. 식량을 북쪽 독일지방에서 공수해 먹던 슈비츠 지방의 약점을 이용하여 중요한 식량 수송 길을 막아버렸던 것이죠. 이에 동맹군은 취리히 타도에 나서고, 스위스 동맹에 불만을 품고 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취리히 주의 편을 들면서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막상 전쟁이 시작되니 집안싸움이 한창이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원은 미미했고, 취리히의 군사력은 동족끼리의 전쟁에서는 크게 발휘되지 않아 취리히의 대패로 전쟁은 끝나게 됩니다. 다행히 취리히 주는 동맹에 다시 가입하게됩니다.

- 점차 성장하는 스위스 동맹을 고깝게 본 나라가 있었으니 프랑스입니다. 백년 전쟁의 피해에서 회복되자 서서히 이웃 나라에 간섭을 하기 시작합니다. 스위스 동맹이 프랑스와 자연 국경을 이루는 쥐라 산맥까지 확장되자, 프랑스에서는 몇 차례 스위스를 침공하지만, 번번히 실패합니다. 

- 프랑스의 지속적인 침략에 대비하여 스위스는 부르고뉴 왕국과 동맹을 맺으려 합니다. ( 부르고뉴 왕국은 지금은 프랑스 영토지만, 프랑스가 강해지기 전 오랫동안 프랑스와 경쟁하던 나라로 프랑스와 맞먹는 강대한 세력을 떨치던 왕국이었습니다. )

이미지 출처 : 이원복의 새 먼나라 이웃나라 스위스편


이에 프랑스는 오히려 스위스 동맹과 손을 잡게 됩니다. 부르고뉴 왕국도 결국엔 합스부르크 왕가의 핏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프랑스와 스위스의 동맹을 괘씸하게 여긴 부르고뉴 왕국은 군사를 일으켜 스위스 & 프랑스 연합과 부르고뉴 왕국과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여기서도 스위스 동맹이 또 승리하게 됩니다.

- 부르고뉴 왕국은 꺾은 프랑스는 크게 만족하며 빼앗은 영토의 절반 이상을 스위스 동맹에 주었는데, 이는 프랑스의 계략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부르고뉴 왕국과 서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평화 조약을 맺어서, 절반 이상의 영토를 차지한 스위스 동맹을 공격할 구실을 마련한 것입니다. 당시 부르고뉴 왕은 "용감한 카를( Karl der Kühne, 1433~1477 ) " 라는 별명을 가진 왕으로써 합스부르크 왕가와 친척관계를 갖고 프랑스와 경쟁하던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1467년 부르고뉴의 용감한 카를은 스위스 동맹군을 꺾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 전쟁은 2년간 지속되었습니다. 2년간의 전투에서 세 번의 큰 전투 ( 그란드슨 전투(1476), 무르텐 전투(1476), 낭시전투(1477) )가 있었는데 모두 스위스 동맹군이 대승리했습니다. 스위스 동맹군은 이번엔 오히려 적의 땅에까지 쫓아들어가 큰 지역의 땅을 차지합니다. 이에 용감한 카를은 그 해를 못 넘기고 화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 스위스 동맹은 몇 차례의 전쟁으로 더 큰 땅덩이를 차지했지만, 항상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위협을 가지고 있는 것을 꺠림직해 합니다. 이에 점령한 부르고뉴 땅을 프랑스에 매각합니다. ( 15만 굴덴을 받았다고 하네요.. ) 

 
- 항상 승리만을 거두던 스위스 동맹이 대패한 적이 있는데 스위스 동맹의 연합이 13개 주가 되었을 때, 우쭐해진 스위스군은 양지바른 이탈리아 땅을 눈독들이며 몇 차례 소규모 침공을 합니다. 이 때 이탈리아에 큰 관심이 있던 프랑스와 싸움이 붙어 1515년 크게 패하였습니다. 이후로 스위스는 자기 땅 지키는 목적이 아닌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가요 스위스의 역사를 아는 것은 곧바로 당시 유럽대륙을 재패했던 로마제국, 프랑크 왕국, 도이치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 부르고뉴 왕가 등을 함께 알게 되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간단하게 스위스의 역사만을 알았을 때는 스위스는 맨날 강대국들에게 밟히다가 겨우 운 좋게 독립을 한 것처럼 느껴졌는데, 역사를 깊숙히 알고 보니 스위스는 강력한 국가였네요.

다음 3부에서는 근대쪽으로 다가와 종교개혁 부분부터의 스위스 역사를 다룹니다. 3부에서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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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8.22 07: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쓰느라 고생했네~

  2. 김태희 2012.08.22 1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복권 대신 꽃을 사보세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꽃 두세송이라도 사서 모처럼 식탁위에 놓고보면 당청 확률 백퍼센트인 며칠간의 잔잔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라는 구절을 보고 돼지왕왕님이 떠올랐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Posted by 돼지왕왕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