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유럽지역 종교개혁 전까지의 스위스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이후부터의 스위스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죠.
스위스의 종교 개혁 & 30년 전쟁
-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의 횃불을 들면서 유럽은 온통 신교( 기독교 ), 구교( 천주교 )로 갈라져 죽고 죽이는 싸움판으로 변합니다. 지금은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옛날의 유럽은 카톨릭 교가 나라마다 국교로 지정되어 있어 믿지 않는 사람이나 교회의 뜻에 반하는 사람은 이교도로 치부하여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곤 했죠. 이런 방법으로 세력을 키운 카톨릭 교회가 부패하기 시작하자( 대표적인 사례가 "면죄부" ), 카톨릭 교회의 잘못을 외치며 뒤집어 엎어야 한다는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 스위스 지방에는 유명한 종교개혁가 두 명이 있습니다. 한명은 제네바 지방의 "장 칼뱅( Jean Calvin, 1509~1564)". 한명은 취리히 지방의 "울리히 츠빙글리( Ulich Zwingli, 1484~1531 )" 였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blog.daum.net/sirius2375/166
- 알프스 지방의 주들은 강압적인 츠빙글리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옛 카톨릭교로 돌아설 것을 선언하고, 츠빙글리는 이를 무력으로 제압하려 합니다. 평지 지방의 스위스 동맹 주들은 츠빙글리 편에 서고, 산악 지방의 스위스 동맹 주들은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이 반대편은 계속해서 커지는 츠빙글리의 신교파에 대항하기 위해 카톨릭을 믿는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왕과 손을 잡게 됩니다.
- 1529년 전쟁의 나팔이 불리고,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신교파였던 "베른(Bern)" 주가 신교파와 함께 전쟁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베른 영주 "애블리"는 휴전 협정을 주선합니다. 하지만 츠빙글리는 카톨릭 세력을 꺾을 생각을 접지 않고 이웃 도이치 왕국은 물론 덴마크까지 한편으로 끌어들여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세력이 어느 정도 커지자 츠빙글리는 최후의 선언을 합니다. 산악지방 스위스 주들에게 카톨릭교를 버리지 않으면 식량이 운반되는 모든 길을 막겠다는 협박을 합니다. 이에 다시 츠빙글리의 신교파와 스위스 산악 주들의 구교파가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카펠( Kappel )"에서 두 번에 걸쳐 전투를 벌이는데, 카톨릭 군이 두 번 다 대승을 거둡니다. 여기서 츠빙글리는 전사하고 맙니다.( 1531 ) 그리고 카톨릭 군은 취리히를 비롯한 일부 지방을 점령합니다.
이미지 출처 :http://www.flagfocus.info/country/switzerland.html
- 츠빙글리는 비록 야망은 이루지 못했지만, 스위스가 낳은 대 정치가, 종교 개혁자, 그리고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이로 인해 현재 스위스의 종교는 제네바 베른 등 서쪽 스위스는 신교를 믿고,
2012. 08. 26. 댓글에 "취리히"는 대표적인 신교지역이라는 글이 있더군요. 인터넷 확인 결과 취리히는 대표적 신교 지역이었습니다. 이원복 교수의 자료도 틀린 것이 있었군요? ^ ^;
- "장 칼뱅( Jean Calvin )" 역시 스위스에서 종교 개혁을 시작합니다. 칼뱅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법관이 되고자 법률 공부를 시작했으나, 마르틴 루터가 시작한 종교 개혁에 끼어들어 카톨릭을 버리고 열렬한 신교도가 됩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는 신교도를 몹시 탄압하였고, 그는 신교도들이 많은 스위스의 제네바로 이주하여 신교의 전도사로서 활동합니다. 츠빙글리와 비슷하게 칼뱅의 주장과 요구도 당시 사람들에게 너무 지나쳤기에 1538년 제네바에서 쫓겨나 다시 프랑스로 돌아갑니다. 파리에서 쫓겨 도망쳐 온 신교도들이 많이 모여 있는 스트라스부르란 도시에서 신교도들을 돌보는 일을 하던 칼뱅은 1541년 엄하고 철저한 종교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스위스 제네바에 부름에 응하여 제네바로 돌아옵니다. 칼뱅은 신교도들을 모아 큰 세력을 떨치고 정치 권력까지 손에 쥐어 제네바 최고의 통치자가 됨으로써 신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종교인으로서 정치지도자가 됩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sjw.or.kr/church_school/photo/index.php?t_code=31&g_code=7&s_code=27
- 제네바에서 권력을 잡은 칼뱅은 종교 재판소를 만들어 종교뿐 아니라 모든 문제를 종교 재판으로 엄히 다스렸고, 혹독한 정치로 시민들의 자유를 크게 제한하며 시민들을 철저한 신교의 믿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1549년 스위스 동쪽의 츠빙글리를 따르던 신교도들과 손을 잡고 온건한 마르틴 루터와 과격한 츠빙글리를 절충한 칼뱅식 신교 교회( 칼뱅교 )를 이룩하여 신교가 온 유럽에 크게 퍼지는 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합니다. 칼뱅은 독재 권력을 20여년동안 행사했는데, 이 때 경제 문제까지도 손을 대서 농업보다는 공업에 치중하도록 합니다. 칼뱅의 명령으로 제네바 지방에 공장들이 세워지기 시작하고, 그 가운데 섬유 공업과 시계 공업이 큰 줄기를 이루어 현재의 스위스 산업의 근간이 되도록 합니다.
이미지 출처 : http://flagspot.net/flags/ch-ge.html
- 칼뱅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스위스의 카톨릭 교 주들은 그들끼리 동맹을 믿게 됩니다. ( 흥미롭게도 "아펜첼" 이란 주는 평야 지대는 신교를, 산악 지방은 카톨릭을 믿어 주를 반으로 나뉘는 "반주" 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바젤 주는 후에 혁명파와 혁명반대파 2개의 주로 나뉩니다. )
이미지 출처 :http://twoseriousbikes.blogspot.kr/2010_12_01_archive.html
- 스위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신교와 구교로 세력이 나뉘어 전쟁을 벌이곤 했는데, 결국 도이칠란트를 무대로 큰 전쟁이 터지고 맙니다. 이것이 유럽의 역사를 바꿔 놓은 유명한 "30년 전쟁( 1618~1648)" 입니다.
<독일에서 30년 전쟁이 발생한 이유>
- 프랑스는 어린 왕의 어머니로 권력을 잡고 있던 카타리나 메디치의 명령으로 1572년 8월 24일 밤 12시를 기해 전국 모든 교회가 종을 울리는 것을 신호로 파리에서만 2천 여명, 지방에서 2만 여명 등의 신교도들을 카톨릭 교도들이 무차별로 학살합니다. 이를 "바르돌로메우스의 밤( Bartholomäus )" 이라고 하여 카톨릭 교회가 저지른 가장 큰 범죄의 하나입니다. 프랑스는 살아 남은 신교도들을 대부분 외국으로 쫓아내 프랑스를 완전한 카톨릭 국가로 만들어 버립니다.
- 에스파냐(스페인)에서는 루터의 종교 개혁운동이 시작되기 무섭게,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주도로 1534년부터 카톨릭 교의 잘못을 바로잡는 "예수회 운동( Jesuit )"을 시작합니다. 이와 동시에 신교도들을 모조리 처형하거나 외국으로 추방하여 더욱 엄격한 카톨릭교를 확정짓습니다. ( 지금도 에스파냐는 유럽에서 가장 엄격한 카톨릭 국가입니다. )
- 이탈리아는 교황이 있는 나라라 카톨릭 교가 뿌리박힌 곳이었습니다.
- 영국도 철저한 카톨릭 국가였습니다. ( 예쁜 여시중 "앤 볼레인" 에게 새 장가 못가게 한다고 화가 난 "헨리 8세"가 카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영국교회 "성공회"를 선포하고 종교 분쟁을 벌이긴 했습니다만.. )
이미지 출처 : 이미지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oebok&logNo=20118124678&viewDate=¤tPage=1&listtype=0
헨리 8세 ( Henry VIII )
이미지 출처 : 이미지 출처 : http://cafe425.daum.net/
엔 볼레인( Ann Boleyn )
이미지 출처 : 이원복의 새 먼나라 이웃나라 스위스편
- 도이칠란트는 하나의 통일된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개의 작은 주로 나뉘어 주마다 신교 구교로 으르렁대던 판에 신교, 구교 사이의 전쟁이 터지자 이웃의 나라들이 마구 끼여들어 온통 쑥대밭이 되 버린 것이 바로 30년 전쟁.
- 30년 전쟁의 발단은 도이칠란트의 보헤미아 지방에서 신교, 구교의 싸움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이 싸움을 온 도이칠란트가 두 패로 갈라져 응원하게 되면서 전쟁은 크게 번졌습니다. 여기에 카톨릭을 믿는 합스부르크 왕가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참전하고, 오스트리아의 반대세력 프랑스가 카톨릭 국가임에도 신교 편을 들어 전쟁에 끼여듭니다. 에스파냐가 카톨릭을 거들기 위해 군대를 보내니 신교 국가인 스웨덴, 영국도 끼어들어 도이칠란트는 전국이 전쟁터로 변하고 유럽 거의 모든 나라가 끼어든 첫 국제 전쟁이 되버리고 맙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본 스위스는 그들의 고귀한 자유, 독립을 신교, 구교의 종교 다툼으로 빼앗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 30년 전쟁에 참가하면 나라가 쑥대밭이 될테고, 참가하지 않으면 신교, 구교의 분쟁으로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아 결국 큰 전쟁이 날 것이다. ) 이에 각 주의 자치권을 살려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고, 이웃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중립을 선언합니다. 그리고는 스위스 동맹군을 신교, 구교 가릴 것 없이 연합, 단결시켜 모두 국경 수비에 투입합니다. 이 슬기로운 "무장 중립" 을 통해 스위스는 30년 전쟁에서 교묘히 발을 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스위스 역사에서의 첫 "중립 국가 선언" 이었고, 이 중립은 "무장 중립"을 기본으로 합니다.
30년 전쟁 그 후
-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나고, 전쟁에 참가했던 여러 나라들은 전쟁 뒷처리를 의논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입니다. 150여년 간 스위스 동맹은 사실상 독립을 누려 왔으나, 형식적으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오스트리아의 간섭에서도 자유로워지기 위해 이 참전국 회담에 스위스는 "바젤"시 시장 "베트슈타인( Wettstein )" 을 특사로 파견합니다. 베트슈타인은 뛰어난 외교 솜씨를 발휘하여 신교측 대표들과 카톨릭측 대표들을 번갈아 가며 로비 활동을 활발히 합니다. 30년 전쟁이 무승부로 끝나기는 했으나 영국, 프랑스가 가담한 신교파가 조금 더 우세한 형편이었기에,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등 카톨릭파는 신교파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야만 했습니다. 베트슈타인의 외교 덕에 스위스의 독립 문제가 회담에 오르게 되는데 , 이 때 네덜란드의 독립 문제도 함께 오릅니다. 스위스, 네덜란드 모두 원래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인데, 합스부르크 왕가가 둘로 갈라져 한쪽은 오스트리아, 다른 한쪽은 에스파냐의 왕가가 됩니다. 이 때 네덜란드는 에스파냐가, 스위스는 오스트리아가 맡아 지배하게 됩니다. 두 나라는 사실 끈질긴 투쟁으로 사실상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30년 전쟁으로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가 기가 꺽인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을 영구히 확정지으려 한 것이죠. 이것을 합스부르크 왕가와 원수인 프랑스, 영국 등이 밀어주었습니다. ( 프랑스 입장에서는 이탈리와 교류하기 위해서 스위스가 중립일 필요가 있었으며, 오스트리아의 세력을 약하게 만드는 데도 꼭 필요했습니다. )
이미지 출처 : http://www.about.ch/cantons/basel.html
- 30년 전쟁 끝의 평화 회담은 오랜 토론 끝에 "베스트 팔렌 조약"을 맺게 되는데 그 핵심 내용은..
1. 도이칠란트에서 신교파의 종교 자유를 인정한다.
2. 도이칠란트에서 각 주의 주권을 인정하고 신교파 주의 주권, 외교권을 인정한다.
( 수십개의 작은 영주국으로 산산조각나 3류 국가로 몰락 )
3. 프랑스, 스웨덴, 프러시아의 영토를 늘린다.
( 프랑스, 도이틸란트 국경 지대인 알자스, 로렌 지방이 프랑스로 귀속 )
4.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독립을 인정한다.
...
이로 인해 스위스는 국제 무대에 당당하게 독립 주권 국가로 등장하게 됩니다.
- 이렇게 온 유럽이 프랑스 혁명군과의 전쟁을 치를 때에도 스위스는 역시 무장 중립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프랑스도 스위스의 중립을 인정 했으나, "자유, 평등, 박애" 의 프랑스 혁명 정신이 스위스에도 퍼지기 시작하면서, 스위스 지배자들을 몰아내고 백성들이 나라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운동이 서서히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스위스의 지배자들은 혁명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시작되고, 혁명세력은 프랑스에 원조를 요청합니다. 스위스와 프랑스간의 전쟁이 터지고, 석 달만에 프랑스 군대는 스위스를 점령합니다. 독립한 지 150년에, 그리고 스위스 동맹이 생긴 후 처음으로 온 나라가 적에게 점령당한 수치를 당합니다.
- 표면적인 이유는 혁명 전쟁이었지만, 사실 프랑스의 속셈은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열쇠이며 적국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기 좋은 스위스를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스위스를 점령한 프랑스는 지금까지 여러 개의 주로 갈라져 귀족들이 다스리던 스위스 동맹을 깨뜨리고, 모든 국민이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갖고 하나의 통일된 나라를 만듭니다. 그리고 몇몇 특권층에 의한 나라가 아닌 국민에 의한 나라가 되도록 합니다. 공화국화 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름도 "헬베티아 공화국( Republique Hevetique )" 로 바꾸어 버립니다.
- 1273년 맺어진 스위스 동맹은 500여년 만에 깨지고, 1798년 "헬베티아 공화국" 이 세어지는데, 헬베티아 공화국은 중앙 집권제를 유지합니다. 프랑스의 요구에 따라 혁명 과업을 수행하는데, 누구나 자유롭게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갖고,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었습니다. 중앙집권제로 전환하기 위해 우선 규모가 큰 주는 여러 개의 작은 주로 나누고, 작은 주는 몇 개씩을 합쳐 그 크기를 비슷비슷하게 만들었습니다. 정치에 간섭하는 교회의 세력을 막기 위해 교회만이 갖는 특권을 모조리 없애 버렸으며, 정부에서 보낸 관리가 각 주를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이어 각 주마다 달랐던 돈과 우표를 폐지하고, 통일된 돈과 우편제도를 마련했으며, 정부에 대들 소지가 있는 조합을 금지시킵니다. 강제로 납세했던 교회세를 폐지하고, 어떤 죄를 짓더라도 고문하지 않으며, 교육의 의무를 지게 했습니다.
- 이런 갑작스런 변화는 자유와 자치를 보장받던 스위스의 많은 주로부터 반발을 일으키게 됩니다. 주의 권리와 자유를 되찾기 위한 폭동이 여기저기서 터졌고, 특히 오랫동안 남의 간섭 안 받고 살아 온 알프스 산악 지방의 반항이 심했습니다. 이에 스위스 정부는 프랑스에 도움을 청하고, 프랑스 군대는 폭동 세력을 제압해버립니다. 프랑스 적대국인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손잡고 스위스에서 프랑스를 몰아내기 위해 진격합니다. 1799년 취리히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군과 프랑스 군대가 두 번에 걸쳐 전쟁을 치르는데, 두 번 다 프랑스 군대가 대승을 거두며, 연합군은 후퇴를 합니다. 이 전쟁으로 스위스는 전쟁폐허가 되어 버립니다.
- 프랑스는 연합군에 승리한 이후 혁명 정신을 빌미로 본격적으로 스위스에 간섭을 시작합니다. 이에 반대 세력은 다시 살아나고, 한편으로는 중앙집권을 고집하는 세력도 많았습니다.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 뜻을 모아 행동을 벌였으니 이것이 바로 스위스의 첫 정당의 탄생이라고 하네요. 하나는 통일당( 중앙 정부 ), 하나는 연맹당( 지방 자치 )으로 스위스 국민은 두 당으로 갈라져 폭동, 데모, 난동을 지속적으로 벌였습니다. 통일당과 연맹당은 하루도 조용할 날 없이 시끄러웠고, 4년 동안 다섯 번의 큰 내전과 셀 수 없을 정도로 피를 흘리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 나폴레옹은 이런 스위스 사태를 보고 통일당과 연맹당의 대표를 불러 양쪽이 만족할만한 헌법을 만들도록 합니다. 그 헌법 내용은 각 주는 주의 일을 자유롭게 해나갈 권리는 도로 가지되, 다른 나라와의 외교라든가 나라를 지키는 군대를 관리하는 일 등의 국가적 차원의 일은 중앙 정부에게 맡기도록 합니다. 이것이 1803년 재정된 새로운 헌법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ilbe.com/112319893
- 연합군 중 영국만이 유일하게 나폴레옹과 계속해서 싸움을 벌였는데, 이에 나폴레옹은 영국을 꺾기 위해 대함대로 침공을 시작합니다. 영국의 넬슨 제독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에 대승을 거두니, 나폴레옹은 전략을 바꾸게 됩니다. 영국이 섬나라라는 것을 이용하여 대륙과의 교류를 끊어버리면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죠. 그래서 유럽 대륙의 어떤 나라도 영국과 무역하거나 왕래하는 것을 금지하고, 영국으로 건너가는 배는 모조리 부수어 버린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륙 봉쇄령" 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blog.ohmynews.com/gompd/161726
-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영국은 모든 무역이 끊어지고 물자가 모자라 큰 혼란에 빠지지만, 영국에 물건을 팔던 유럽 나라들도 큰 고통을 받게 됩니다. 영국이 대륙국가의 물건을 사서 세계식민지에 팔아 주었는데, 영국과 교역을 못하게 되자, 수출의 길이 막히게 되고 그것은 곧 경제위기로까지 다가옵니다. 반면에 영국은 정말 급하고 필요한 것들을 아메리카나 동양 식민지에서 가져다 씁니다. 결론적으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은 대륙의 여러 나라들만 꽁꽁 묶어논 격이 되어 버립니다.
- 대륙 봉쇄령으로 큰 손해를 입은 나라는 러시아와 스위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면화, 곡식 등을 영국에 내다 팔아서 나라 살림에 큰 보탬이 됐고, 스위스는 영국에 양털 또는 짠 옷감을 수출하고 면화를 수입했는데, 스위스에서 가장 큰 공업인 방직 공업이 영국과의 거래가 끊겨 큰 타격을 받자 스위스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 버린 것이죠. 스위스는 영국과의 교역을 몇 차례 허락받으려 하지만 번번히 실패하였습니다. 러시아도 몇 차례 요구하지만 거절당하자, 나폴레옹의 명을 어기고 영국과 몰래 교역을 시작합니다. 이에 분노한 나폴레옹은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지만 영국과 러시아의 교역은 계속되죠. 1812년 나폴레옹은 군사를 일으켜 러시아 정벌에 나섭니다. 러시아의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모르던 프랑스 대군은 러시아에 대패합니다.
- 패배한 나폴레옹에게 결정타를 안기기 위해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스웨덴은 다시 동맹을 맺고 군사를 일으키는데, 이를 제 2차 대프 동맹이라 합니다. 1813년 6월 라이프치히( Leipzig ) 에서 프랑스 대군와 연합군 대군은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고 16일~19일까지 나흘간의 대첩 끝에 연합군이 승리를 거둡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leipzig.world-guides.com/leipzig_maps.html
-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승리한 연합군은 진격을 게속하여 프랑스를 궁지에 몰아 넣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스위스는 다시 중립임은 선언합니다. 이전과 같이 2만의 군대를 국경에 배치하고 무장중립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혁명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연합군을 그대로 맞아들여 연합군은 아무런 싸움도 하지 않고 스위스 전국을 점령, 새로운 지배자로 군림하게 됩니다.
- 연합군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로서 스위스를 지배합니다. 둘의 꿍꿍이는 달랐는데, 오스트리아는 스위스의 세력을 꺽기 위해서 스위스를 여러 갈레로 다시 찢어 작은 나라로 만들고자 했고,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스위스를 더 크게 만들고자 합니다.
- 나폴레옹이 물러가자, 전 유럽에서는 혁명 정신을 가진 무리와, 혁명 세력을 쓸어내고 옛날 왕과 귀족이 있던 시대 재건을 원하는 무리가 마찰을 일으킵니다. 이런 저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와 싸워 이긴 국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이것이 바로 1814~1815년의 "빈(Wien) 회담"입니다. 여기서 오스트리아는 스위스를 잘게 쪼개려 했고,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견제를 위해 이를 반대합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많은 나라들( 영국, 프랑스, 러시아, 프러시아, 에스파냐, 스웨덴 등 )이 러시아에 찬성을 했습니다. 스위스는 오히려 영토를 늘렸고, 자주 독립과 완전한 주권을 인정받습니다.
- 자주 독립과 완전한 주권을 인정 받는데는 혁명 반대 세력이 공이 컸기 때문에, 스위스는 혁명 반대 세력이 다시 실권을 잡게 됩니다. 하지만 연합군 특히 오스트리아의 간섭은 계속 됩니다. 강제로 그들 연합군 동맹인 '신성 동맹' 에 가입시키는가 하면, 군대의 규모를 조절할 때에도 신성동맹의 허락을 얻어야 했습니다. 이에 힘이 필요함을 느낀 스위스는 군대를 2만에서 7만으로 크게 늘리고, 이들 군사를 빨리 이동시킬 수 있도록 군사 도로와 다리, 터널, 알프스를 넘는 길 닦는 공사를 벌입니다. ( 이것이 현재 관광수입에 지대한 기여를 하죠. )
- 프랑스 혁명의 불꽃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다시 혁명파와 혁명 반대파들로 나뉘어 싸우게 됩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혁명 반대파가 되고, 젊은 사람들과 각계 각층의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 혁명 정신파가 되어 싸웁니다. 민주, 평등, 자유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데모가 잇따르고, 이에 수많은 시민이 뜻을 같이 하여 데모에 가세함으로써 많은 주들이 이에 굴복하여 오스트리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주, 평등의 원칙을 받아들입니다.
- "바젤(Basel) 주"의 경우는 주를 둘로 나누어 혁명 세력의 "바젤 시 주( Basel Stadt )"와 반대 세력의 "바젤 지방 주( Basel Land )"로 나뉘는 등 나라는 혼란에 빠집니다. 이렇게 나라는 점차 혁명 세력이 지배하는 주와 반대 세력이 지배하는 주로 나뉘게 됩니다. 혁명 반대 세력 주는 이를 지지하는 오스트리아 등의 외국과 손을 잡고 혁명 세력이 지배하는 주를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이 외국과의 동맹을 "특별 동맹( Sonder Bund )" 라 부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es.wikipedia.org/wiki/Archivo:Flag_of_Canton_of_Basel.svg
이미지 출처 : http://da.wikipedia.org/wiki/Fil:Flag_of_Canton_of_Basel_Land.svg
바젤 주 ( Basel ) 엠블렘
- 혁명 반대 세력이 특별 동맹을 맺게 되면서, 혁명 세력에서 이를 두고 보지 않습니다. 스위스 동맹에 의해 스위스의 모든 주는 마음대로 외국과 동맹을 맺지 못하도록 헌법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혁명 세력의 반발도 무시한 체, 혁명 반대 세력은 혁명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세력과도 손잡으려 했습니다. 이에 스위스 안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어 갔는데, 이 때 혁명 세력의 군대를 지휘하는 훌륭한 장군, 제나바 출신의 "앙리 뒤푸르" 가 등장합니다. 그는 애국심이 뛰어난 군인으로 스위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오스트리아 등의 특별 동맹군을 쳐부수기로 합니다. 스위스 통일을 건 전쟁이 일어나고, 뒤푸르 장군은 특별 동맹군을 상대로 연전 연승 매번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동맹군이었으나, 뒤푸르 장군의 기막힌 작전에 꼼짝 못하고 패배하게 됩니다. 수없이 치러진 전투 속에서 전사한 뒤푸르 장군의 군사 숫자는 고작 138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 그는 스위스 지도를 만든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 이로 인해 스위스는 다시 무장 중립국임을 선언하고, 외국이 간섭하는 일이 없는 완전한 자주, 독립을 얻게 됩니다.
이미지 출처 : http://people.nate.com/people/info/gu/il/guillaumehenri/
이로서 스위스가 완전한 독립을 하는 데까지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유럽을 좋아하는 사람의 하나로써 유럽의 역사는 언제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나라의 역사가 주변국과 얽히고 설켜 있고, 주변국의 갯수도 많으니 뭔가 더 재미있습니다.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도 좀 들구요. 그럼 현대의 스위스에 대한 내용으로 4부에서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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