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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 화폐란 주조된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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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우리 인간은 늘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필요로 하며 살아간다.
철학자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을 부정한다.
타인에게 인정을 받으면 확실히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인정받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
인정 욕구는 상벌교육의 영향이다.
아들러는 상벌교육을 맹렬히 비판했는데, 상벌교육의 결과로
"칭찬하는 사람이 없으면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거나, 벌주는 사람이 없으면 부적절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가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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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우리는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기대 같은 것은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
타인의 인정을 바라고 타인의 평가에만 신경을 쓰면, 끝내는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 라는 기대를 만족시키다 보면, 자신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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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우리는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 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타인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관계의 트러블은 대부분 타인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하는 것,
혹은 자신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해 들어오는 것에 의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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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 를 어떻게 구분하나?
철학자
누구의 과제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 를 생각하면 된다.
청년
그럼 아이가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아도 그것은 아이의 과제니까 방치해야 하나?
철학자
아들러 심리학은 방임주의가 아니다.
방임은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
그게 아니라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켜보는 것.
본인의 과제임을 인지시키고, 공부하고 싶을 때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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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상담 시에 내담자가 변하는가, 변하지 않는가는 카운슬러의 과제가 아니다.
카운슬러는 내담자가 어떤 결심을 했는가, 생할양식을 바꿨는가, 바꾸지 않았는가에 대해 개입할 수 없네.
물론 최선을 다해 돕지만, 끝까지 개입하지는 않는다.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 인 것.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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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오히려 가까운 가족이야말로 더 의식적으로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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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만약 인생에 고민과 괴로움이 있다면, 그 고민은 인간관계에 있으니
먼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내 과제가 아니다" 라고 경계선을 정하라.
그리고 타인의 과제는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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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부모님의 기대에 대해 그럼 부모님이 얼마나 슬퍼하든 관계없나요?
철학자
관계 없다.
청년
불효를 권장하는 철학인가?
철학자
자신의 삶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믿는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것" 그 뿐.
그 선택에 타인이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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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나의 선택에 대해 나의 행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 는 내 과제가 아니다를 인지하는 것이 핵심.
다른 사람의 과제를 신경쓰지 말아라.
그리고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 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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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과제의 분리는 인간관계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입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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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인간관계를 '보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내가 이만큼 줬으니까 너도 이만큼 줘, 라고 바라게 된다.
물론 그건 과제의 분리와는 동떨어진 발상이다.
우리는 보상을 바라서도 안 되고, 거기에 연연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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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하고 싶은 일을 해" 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말이다.
반면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좋은 학교에 가.", "안정적인 직업을 구해" 라고 조언한다.
이는 개입이 아니라 책임을 지려는 태도다.
"내 과제가 아니니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냅두고, 결과는 나도 모른다." 는 냉혈한 아니냐?
철학자
그럼 타인의 내 삶에 대해 어느 정도 결정해주는 개입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건가?
내 인생을 타인에게 맡기면, 다소 불만은 있을지언정 길을 헤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 갈 길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되면 이리저리 해메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타인이 정해준 이정표를 따라가는 삶.
너무 부자유스러운 삶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선택하곤 한다.
이는 인정욕구보다도 근본적으로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이다.
청년
누가 미움을 받고 싶어하는가?
철학자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으려면, 주변 사람의 안색을 살피면서
모든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 뿐이다.
미움받지 않고 싶다는 일념에 사라잡히면,
할 수 있다고 약속하거나 책임지지 못할 일까지 떠맡게 될 소지가 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은 더 고달파 질 수 있다.
결국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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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자기중심적으로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말인가?
철학자
과제를 분리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이 아니다.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중심적인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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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우리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있다.
타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인간에게 극히 자연스러운 욕망이며 충동이다.
칸트는 이러한 욕망을 가리켜 "경향성"(본능적인 욕망, 충동적인 욕망) 이라고 했다.
인간은 이런 경향성에 저항할 수 있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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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 이다.
청년
뭔말?
철학자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것이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
모두에게 인정받고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건 부자유스러운 동시에 불가능한 일이다.
자유를 행사하려면 대가가 따른다.
자유를 얻으려면 타인에게 미움을 살 수밖에 없다.
청년
악당이 되라고 부추기는 악마의 사상이네?
철학자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다.
청년
그래서 미움 받으라고?
철학자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
일부러 미움받을 짓을 하라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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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나를 좋아해야 한다.", "이렇게 애를 썼는데 좋아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상대의 과제에 개입하는 보상적 발상이다.
미움을 살 가능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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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바라는 것은 내 과제.
"나를 싫어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이다.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거기에 개입할 수 없다.
물론 "말을 물가로 데리고 가는" 노력은 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물을 마시느냐 마시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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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인간관계의 카드는 언제나 "내"가 쥐고 있다.
예를 들어 관계 회복에 있어서
상대방이 나와 관계를 회복할 의사가 없어도 상관이 없다.
문제는 내가 결심하느냐 마느냐이다.
그리고 물을 마시도록 말을 물가에 데리러 가는 노력만 하면 된다.
다음 글 : 네번째 밤 - 세계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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