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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감성, 자기계발 놀이터

[책 정리]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3 by 류시화

by 돼지왕 왕돼지 2019.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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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책 표지


매장과 파종





나는 너와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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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지는 이유는 단순히 그 사람이 좋아서만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나 자신이 좋아지고 가장 나다워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멀리하고 기피하는 이유는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나 자신이 싫어지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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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과 당신이 한 행동을 잊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게 했는가는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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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가는 감추거나 꾸미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드러내며, 내가 주장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이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 준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인가?

그것이 가장 진실된 나의 모습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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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우리의 말을 들음으로써가 아니라 행위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를 신뢰한다.

내가 설명하지 않는 것을 내 삶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면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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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내가 느낀 것은 슬픔이나 분노가 아니라 무력감이었다.

우리를 쓰러뜨리는 것은 이 무력감이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바로잡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존재가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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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치료 전문가 존 브래드쇼는 우리 안에 있는 내면 아이(inner child)에 대해 말한다.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우리 안에는 성장하지 못한 내면 아이가 있어서 현재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불안한 심리를 초래한다는 이론이다.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어른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인격의 한 측면이 과거의 어느 시절에 고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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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내면 아이는 완벽한 사랑의 대상을 찾아 헤매지만,

불완전한 관계에 실망하고 좌절하면서 상대방에게도 깊은 상처를 준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같은 패턴의 행동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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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아이를 내면 깊숙이 밀어 넣고 최대한 멀리 떨어짐으로써 고통을 끝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아픔의 시간을 길어지게 할 뿐이다.

아이를 찾으러 먼 과거로 갈 필요가 없다.

우리 안을 깊이 들여다보기만 하면 그 아이를 만날 수 있다.

상처받은 아이의 고통이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아이를 처음 발견했을 때, 우리가 할 일은 그 아이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일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상처받은 아이를 알아보고 부드럽게 안아 주는 것은 아픔을 덜어 준다.

다루기 힘든 감정은 여전히 남겠지만, 아픔은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나의 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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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명칭은 역할에 따른 약속 명사일 뿐이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할 때만 의사이며, 교수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만 교수이다.

밖에 나오면 그 역시 승객이고, 길 가는 행인이며, 관광객이고, 손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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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라고 여기는 나의 자아 이미지는 다른 방향으로도 작용한다.

사고나 병으로 몸에 장애를 갖는 순간 자신을 장애인으로 여기며, 장애인이라는 고정 명사와 하나가 된다.

암에 걸린 것이 확인되는 순간 자신을 암환자와 동일시하며, 암환자로 살다가 암환자로 생을 마친다.

그것이 암에 걸리는 일보다 더 불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신과 동일시된 그 암환자가 매 순간 펼쳐지는 존재의 다른 가능성들을 부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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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 암환자인 여성 수행자가 있었다.

그녀는 병실 방문에 "방문객 절대 사절! 아잔 브라흐마는 예외." 라고 크게 써붙였다.

모두가 그녀를 암환자로 대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암환자로서가 아니라 인간 존재로 대해주는 유일한 사람은 아잔밖에 없다고 했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는 그 인간 자체와 대화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아잔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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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시작에 있든 끝에 있든, 절정기에 있든 절망의 나락에 있든,

우리는 언제나 모든 상황을 초월한 존재이다.

당신은 당신이 앓고 있는 병이나 직업이 아니라 당신 자신일 뿐이다.

삶이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닌,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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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추구의 출발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물음은 '나는 무엇이 아닌가?' 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대학교수이고 연예인이고 부자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들은 주어진 역할일 뿐이지 존재 자체가 아니다.


사회가 나에게 부여한 역할과 이미지를 나의 존재로 착각할 때 공허가 싹트며, 이 공허감은 더 많은 외부의 것들로 채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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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존재는 자신이 한가지로 규정되는 것을 부자유하게 여긴다.

모든 사람이 자유를 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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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품사는 흐르는 강처럼 순간순간 변화하는 동사이다.

나는 나의 지난 이야기(my story)가 아니라 이 순간의 있음(i am)이다.





내 영혼, 안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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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무어는 마음의 문제가 영혼을 돌보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바디 케어에는 열중하면서 소울 케어는 지나칠 만큼 무관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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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나무는 걱정을 걸어두는 나무입니다.

일하면서 문제가 없을 수 없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그 문제들을 집 안의 아내와 아이들에게까지 데리고 들어갈 순 없습니다.

그래서 저녁 때 집에 오면 이 나무에 문제들을 걸어 두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침에 다시 그 문제들을 가지고 일터로 갑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면 문제들이 밤사이 바람에 날아갔는지 많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사소한 일상의 문제들을 영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습관을 멈춰야 한다.

영혼이 순수한 기쁨과 웃음을 잃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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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돌봄에는 명상이나 독서뿐 아니라 여행, 예술 활동, 자연과 가까워지는 일도 포함된다.

건강한 음식, 만족스러운 대화, 기억에 남을 뿐 아니라 감동을 주는 경험들도 영혼에 자양분을 선물한다.

또한 예술 감각을 갖는 것, 예를 들어 차 한 잔을 마시는 것과 같은 평범한 행위를 예술 감각으로 수행하는 것은 영혼을 성장시킨다.

예술은 세계를 더 심층적으로 보게 하기 때문이다.

예술적인 삶은 물건을 살 때도 영혼을 지니고 선택한다.

영혼의 돌봄은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대신 숲을 거닐기로 결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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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살고 있지만 우리 자신이 얼마나 오래된 영혼인지 모른다.

영혼을 돌본다는 것은 자신의 내적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영혼을 가진 육체가 아니라 육체를 가진 영혼임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만난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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