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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감성, 자기계발 놀이터

[책 정리]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4 by 류시화

by 돼지왕 왕돼지 2019.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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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책 표지


어떤 길을 가든 그 길과 하나가 될라





순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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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언어만큼이나 쉽게 전염된다.

마음이라는 공간 안에 담겨 있는 '나의 고유의 생각'들은 수많은 '타인의 생각'들과 혼합되어 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생각들과 나를 동일시하면서 '이것은 나야' 라거나  '이것은 내가 아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 참일까? 혹시 외부와 상호작용하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나'인데도 내가 마음이라는 공간 안에 가상의 고정된 나를 만들어 놓고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이 자기 착각은 가장 알아차리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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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나'를 유지하기 위해 내 언어, 내 생각, 내 존재가 다른 것들과 분리된 고유의 것이라는 고집스러운 전제가 있는 듯하다. 그 전제마저도 과거로부터, 타인들로부터 배운 것인데도, 만약 실제로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동일하기까지 한 언어와 생각과 마음의 내용물들을 모두 제외시킨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 나는 '고유의 나'일까? 그렇다면 붓다는 왜 '고유의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단지 세상 만물에 서로 의존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토록 강조했을까?





원숭이를 생각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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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억압할수록 더 강해진다.

생각이 오고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지켜볼 때 비로소 명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스승은 보여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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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이 잘되든 안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명상하려고 하는 의지이다.

그것만을로 충분하다.





어서 와,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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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름 불러 주기(naming)'는 명상법 중 하나이다.

마음은 게스트하우스와 같아서 여러 감정들이 번갈아가며 찾아온다.

반가운 투숙객도 있지만 어떤 감정들은 불청객이다.

마음의 방을 어지럽히고, 소란을 피우고, 불평하고, 문을 발로 차서 일과를 망친다.

잠들 때까지 영혼을 괴롭히는 감정들도 있다.

무의식에 난 틈새로 등장하기 때문에 쫓아내기도 어렵고 잠금장치를 해 둘 수도 없다.


마음챙김 명상에서는 이 감정들에게 이름을 불러주라고 권한다.

슬픈 감정이 오면 "슬픔, 너구나. 어서 와." 하고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에게도 "안녕, 불안. 안녕, 두려움." 하고.

고통스러운 기억과 함께 분노가 일어나면 얼른 이름을 불러준다.

"안녕, 기억. 안녕 분노. 어서 와. 또 왔네." 하고 인사를 나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손님들에게 자신의 집을 영원히 내줄 필요까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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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인 감각 역시 마음속으로 "가려움, 가려움", "두통, 두통" 하고 이름을 불러 주면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습관과 거리를 두게 된다.

산만한 생각과 부정적인 감정의 희생자가 되지 않는 방법이다.

고대의 샤먼들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의 이름을 알면 그것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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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찾아오는 생각과 감정들을 적으로 여기지 말고 협력자로 만드는 것이 명상의 기술이다.

나는 잠시 화가 났을 뿐이지 화가 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잠시 두려울 뿐이지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며,

잠시 슬플 뿐이지 슬픈 사람이 아니다.

본래의 나는 맑고 고요한 존재이다.

우리는 어떤 감정보다 더 큰 존재이기 때문이다.




렌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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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우리를 떠나는 것들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을 떠나 보내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사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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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은 필연적이다.

세상의 어떤 것도 영원히 계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법칙을 제외하고는 무엇도 불변하지 않는다고 붓다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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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날이 어김없이 주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마음의 기대에 불과하다.

어느 것이나 생에 단 한 번의 기회일 뿐, 다음 순간은 보장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우리는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이 세상 역시 우리 각각의 존재를 마지막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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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유리잔을 좋아한다.

이 유리잔으로 물을 마신다.

이 유리잔은 놀라울 만큼 훌륭하게 물을 담고 있으며, 햇빛을 아름답게 반사한다.

두드리면 맑고 투명한 소리를 낸다.

그러나 나에게 이 유리잔은 이미 깨진 것과 같다.

언젠가는 반드시 깨질 것이기 때문이다.

선반에 올려놓았는데 바람이 불어 넘어지거나 내 팔꿈치에 맞아 탁자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면 유리잔은 산산조각이 난다.

나는 그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여긴다.

이 유리잔의 속성 안에 '필연적인 깨어짐'이 담겨 있다.

그것은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유리잔이 이미 깨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이해할 때, 그것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소중해진다.

그것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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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육체도, 내 연인의 육체도 이미 부서진 것과 마찬가지임을 알 때 삶의 매 순간이 소중해진다.

소중함과 가치가 두려움과 슬픔보다 앞선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은 '덧없고 영원하지 않으니 집착하지 말라.' 는 의미만이 아니라 '영원하지 않음을 깨달음으로써 지금 이 순간 속에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다.

'영원하지 않음'을 우리가 통제하려고 하지 않을 때 마음은 평화롭다.





직박구리새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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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곳에 무엇을 배우러 왔을까? 사랑이었을까?

우리의 문제는 단 한가지일 것이다.

'나'의 범위를 '나'에게로 한정 짓는 것.

그래서 '나' 이외에는 모두 타인이며 타자라고 믿는 것.

반면에 공감과 연민은 우리를 더 큰 '나'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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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능한 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갖기를.

만약 내가 이 순간에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친절하기를.

만약 내가 친절할 수 없다면 판단하지 않기를.

만약 내가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면 해를 끼치지 않기를.

그리고 만약 내가 해를 끼치지 않을 수 없다면 가능한 한 최소한의 해를 끼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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